벽에서 벗겨지는 이름들
침묵의 벽에 새겨진 왕들의 이름이 한 획씩 벗겨지기 시작했다. 소리가 나는 벗겨짐은 느리고 뒤쫓을 수 있다. 소리가 없는 벗겨짐은 빠르고 뒤쫓을 수 없다.
침묵의 벽 위의 글자는 본래 영원한 것이었다. 돌은 갈라지고 이끼는 자라고 쇠는 녹슬어도 그 글자들만은 400년 동안 미동도 없었다.
그런데 요즈음 그것들이 떨어지고 있다. 한 획 한 획씩 돌 속에서 사라진다. 무언가가 뒤에서 뽑아 가는 것 같다. 떨어진 자리를 만져 보면 여전히 평평하고, 옆의 돌 면과 똑같이 차고 똑같이 단단해서 거기 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없다.
오래된 수벽군 사이에 전해 오는 말이 있다. 소리가 나는 벗겨짐은 느리고 뒤쫓을 수 있으며, 소리가 없는 벗겨짐은 빠르고 뒤쫓을 수 없다. 소리가 나는 쪽은 먼저 아주 가는 파열음이 한 번 난다. 먼 데서 누가 살얼음을 밟아 깬 것 같은 소리다. 그것을 들으면 달려가 볼 여유가 있어 어느 구간의 어느 획인지 적어 둘 수 있다. 소리가 없는 쪽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. 글자 하나의 아랫부분이 하룻밤 사이에 비어 버리고, 이튿날 교대하러 온 사람이 고개를 들고서야 어젯밤까지 있던 것이 없어졌음을 안다.
그래서 벽 위에는 조령에 적히지 않은 일이 하나 늘었다. 이름 순찰이다. 밤 당직이 제 구간을 걸으며 고개를 들어 훑고, 새로 비어 버린 자리가 있는지 본다. 있으면 수첩에 적는데, 몇 번째 탑인지, 동쪽인지 서쪽인지, 바닥에서 몇 계단 높이인지를 밝혀 적는다. 수첩은 적을수록 두꺼워지고, 글자는 적을수록 줄어든다.
글자가 왜 떨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. 그리고 이 일을 남쪽으로 보내는 전황 보고에 감히 적는 사람도 없다 — 봉화로는 이런 소식을 전할 수 없고 전령은 5일에서 7일을 달려야 하는데, 이 한 문장을 적는 사람은 먼저 따져 봐야 한다. 왕도 쪽에서 이것을 침묵의 변경이 변경의 위험을 부풀려 양곡을 조금이라도 더 타 내려는 수작으로 볼 것인지를.
그래서 수벽군은 그저 말없이, 비어 버린 돌 면 앞마다 잠시 더 서 있다. 벽은 아직 있는데 벽 위의 이름은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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